[닐, 티에리아, 세츠나] 변화
티에리아 시점.
"누가 가장 많이 바뀔 것 같아?"
그것은 어느날 오후의 느긋한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내려온 지구의 섬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창문을 통과해서 들어온 햇살이 넘실대는 공간에서 책을 들고
앉아 있던 록온이, 뜬금없는 말로 말문을 텄다.
홍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있던 티에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시선으로 록온을 바라보았다. 그
가 자주 보살펴주는 가장 나이 어린 건담 마이스터의 영향인지, 록온은 최근 앞뒤 설명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던지는 빈도가 높아졌다. 그것을 본인도 깨닫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티에리아가 아무 대답없이 바라보자 록온은 곧 짧고 간결하게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이 전쟁이 끝나면, 건담 마이스터들 중에서."
그것은 정말로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오리아 슈헨베르그의 계획이 이제 막 서서히
세계에 드러나고 있는 이 때에 하기에는 뜬구름을 잡듯 머나먼 날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말을 꺼낸 당사자는 그런 것에는 상관없이 대답을 해주길 바랐다. 방금 전까지 조용히
울리던 책장 넘기는 소리가 사라지고 두 사람이 앉아있는 공간은 부드러운 침묵이 내려앉아있
었다.
티에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아무래도 좋은 질문을
이 남자는 왜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요."
애초에 모두가 살아남을지조차 의문이다. 물론 이오리아 슈헨베르그의 계획이 완벽하다는 것
에는 한점의 의심도 없으며, 그것이 성공할 때 까지 티에리아 자신은 건담 마이스터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모두가 살아날 거란 보장은 없다. 더군다나 최연소
마이스터의 그 제멋대로인 전적을 살펴보면 더더욱 그렇다.
어찌보면 매정하게 잘라내는-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한 의도가 담겨있는-대답에 록온은 어떠한
실망의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래,라고 예상했다는 듯이 웃었을 뿐이었다. 그 웃음에 티에리
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지만 록온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고급 소재의 소파에 그의 탄탄한 몸이 푹 파묻혔다. 여전히 넘실대는 햇살이 그의 머리카락에 닿
아 황금색으로 부서졌다. 그 속에서 록온은 천천히 미소지었다.
"내 생각에는 말이지…"
"꽤나 분위기가 변했군."
4년만에 만난 세츠나는 많이 변해있었다. 어린티를 냈던 동그란 볼살은 이제 날렵한 선을 그리고
있었고 커다란 눈은 차분한 빛을 띠게 되었으며, 언제나 그 누군가가 손질해줬던 그의 머리카락은
목 뒤를 살짝 덮고 있었다.
하지만 변한 것은 외형 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과묵한 그에게서 스며나오는 분위기는 예전보다
는 좀 더 무겁게 느껴졌다. 깊고 고요한 바다처럼 무겁게.
"그러는 너는 전혀 변하지 않았어. 그때 그대로다."
외형적인 분위기의 변화를 말하는 대사로 인식 했는지, 세츠나가 의리있게 대답을 돌려줬다. 여전
히 사람의 말을 표면적인 의미로만 파악하는 점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티에리아는 '모두 그렇게
말하더군.'이라고 대꾸했다. 굳이 의미를 제대로 고쳐 전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야기하다보면 의
도치 않게 그때의 이야기까지 꺼내 버릴 것 같았다.
"내 생각에는 말이지, 세츠나가 가장 변할 것 같아."
포근한 햇살 속에서 록온이 말했을 때, 티에리아는 선뜻 납득할 수 없었다. 세츠나 F 세이에이는,
적어도 티에리아의 기준으로 볼 때는 가장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었다.
언제 어디서 보아도 과묵하고 무슨 행동을 할 지 알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지시도 귀담아 듣지 않
고, 앞뒤 설명 없이 돌진할 것 같은 남자. 그것이 티에리아가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판단하게 된
세츠나 F 세이에이었다. 그런 세츠나가 가장 바뀔거라는 상상은 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극히 '뚝심있는'-그래서 베다의 임무를 따르지않을 경우에는 꽤나 골치아픈- 마이페이스였다.
어딘가에 영향을 받아 변하게 될 가능성 따위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 얼굴에 확연하게 드러났는지 록온이 가볍게 머리를 긁적였다.
티에리아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발언이었으려나. 작게 중얼거린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가.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 녀석이니까, 전쟁이 끝나면 분명히
많은 것이 변하겠지."
"……."
"그 때, 나도 그 옆에서 녀석이 변해가는 것을 보고 싶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일까. 직설적이고 간단 명료한 답을 좋아하는 티에리아로서는 더더욱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발언의 연속이었다. 컵 속의 홍차는 어느새 다 식어가고 있었다.
"그 녀석이 변하는데, 나도 조금은 영향을 주고 싶어."
실제로 세츠나가 이렇게 변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록온 스트라토스, 바로 그 본인이었
을 것이다. 4년 전 그 전장의 끝에서, 록온은 그 자신이 전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세츠나 F 세이
에이에게 변화를 주었다.
이 변화를 그가 볼 수 있었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황금색으로 물든 그 공간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록온의 상냥한 눈동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