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츠마리(?)] 재회
세츠나와 마리나.
※ 주의 : 몇십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세츠마리 요소가 있습니다. 있을 겁니다, 아마...?;
아자디스탄은 고요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전 왕녀, 마리나 이스마일이 위급하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마리나는 미확인 MS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던 아자디스탄을 재건해 지금까지
이끌어온 지도자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녀 혼자의 힘으로 해낸 일이 아니었다. 아자
디스탄의 재건은 연합군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나라 안에
서도 마리나 이스마일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비록 연합군의 원조가 있었다고
는 하나, 아자디스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재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음을 들며 그녀의
원조 요청과 노력을 크게 사야한다는 의견과,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재건했어야 했다는 의견이었다.
특히 후자의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아자디스탄이 연합군의 원조로 재건되었기 때문
에 그들의 선전도구로 전락해버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아자디스탄은 연합군의 정치적
선전 문구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연합군은, 아자디스탄은 한때 보수세력들로 인해 연합
군을 적대시했었던 국가였지만 자신들은 그 사실에 개의치 않고 원조를 해 아자디스탄의
재건을 도왔음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중동의 큰 국가였던 아자디스탄이 자신들의 원조
로 재건된 것은 중동국가와 연합군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마리나 이스마일을 이러
한 화해의 발판을 마련해 준 평화의 상징이라고 호들갑스럽게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과도
한 언론플레이에 아자디스탄의 보수세력들은 분노했고, 주위의 몇몇 중동국가들은 아자
디스탄과 마리나 이스마일을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나 이스마일은 그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나라의 재정상태를 점검하고, 앞으로 복구해야하는 시설들을 조사했으며 무너진
정치 체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들을 들여와 발전시키도록 했다. 보수세력은
연합군의 일방적인 선전에 이용되면서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않은채로 그들의 원조와 기
술을 받아들이는 마리나를 연합군의 허수아비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진보세력은 그에 마
리나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라며 덩달아 핏대를 세우고 목청을 높였다. 보수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립은 당연히 국민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해 어느덧 저녁 식탁 앞에서도 격렬
한 찬반논란이 오가게 되었다. 나라 전체가 이분화되어가는 가운데서도 마리나 이스마일
은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은 채 그녀가 해야 할 일만을 묵묵히 처리해나갔다. 나라는 무
척 느린 속도긴 했지만 그래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국민들은 각자의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대립도 점차 형식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시간이 지나갈
수록 연합군이 아자디스탄과 마리나 이스마일을 그들의 선전에 언급하는 횟수도 줄어갔다.
아자디스탄과 마리나 이스마일은 이제 연합군의 선전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전세
계에 먹혀드는 소재도 아니었다.
그렇게 모두의 관심이 서서히 멀어져갈 무렵 마리나 이스마일은 더 이상 20대의 젊고 청초
한 여성이 아니라 이미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황혼기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나이를 이유로
한 나라의 지도자 자리를 내려놓았다. 그 후로 그녀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마리나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 국민들에게 전해진 것은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올 쯤이었다. 아자디스탄 왕실은, 마리나의 건강 상태를 알리며 동시에 그녀가 가장 좋
은 의료 설비를 갖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그 공표와는 달리 마
리나가 거처하는 곳은 별궁이었다. 마리나가 모든 치료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치료 대신
그녀가 요구한 것은 그녀의 취향대로 수수하게 꾸며진 작은 침대와 낡은 풍금이 전부였다.
하지만 때때로 부드럽게 울렸던 풍금소리도, 그녀의 따뜻한 노래도 더 이상 듣기 힘들게 될
정도로 마리나의 몸은 쇠약해져있었다. 마리나의 의사를 존중해 의료기구는 모두 치워졌다.
모두들 그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잠에 들어있는 시간이 길어지
던 그녀가 모처럼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지금 자신의 침대 옆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남
자에게 말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전 왕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사람들
이 문 밖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남자가 문으로 향할 때, 마리나가 조그맣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츠나."
그 부름에, 남자가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묵직하지만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오래된 나무문이 닫혔다. 천천히 뒤로 돈 남자가 마리나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마리나."
머리카락이 이미 하얗게 물든 마리나를 향해 경칭을 생략한 채 이름을 부르기에는, 남자의
외관은 너무나 젊었다. 그러나 그는 기껏해야 20대 초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생김새와는
달리 무거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연륜을 느끼게 하는 깊은 빛이 담겨있는 적갈색 눈동
자가 마리나를 담으며 작게 떨렸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후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는 그를
향해 마리나가 웃었다. 자애로운 웃음이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줄 알았어."
"미안하다."
고개를 떨군 채로 남자가 사과했다. 그와 마리나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은, 남자가 부상을
입고 마리나가 몸을 피해 있던 카탈론 지부로 찾아왔을 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수십년
전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모습은 그때로부터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나는 그 사
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 그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은 마치 오랜만
에 아들을 만난 어머니와도 같았고, 동생을 보듬어주는 누나와도 같았으며,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연인을 보는 여인과도 같았다.
남자는 말없이 마리나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은 약간 차가웠다. 지금은 마리나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은, 아자디스탄이 무력으로 인한 분쟁을 일으킬 경우에는 가차없이 이 나라를
공격할 손이었다. 남자가 마음을 연 여인이 사랑했던 이 나라를. 그것이 그 남자가 선택했던
길이었음을 마리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마리나가 생각했던 길과 남자의 길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해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마리나는 천천히 남자의 손을 마주잡았다. 파괴밖에 할 줄 모른다던 남자의 손에 조금씩 따
뜻함이 배어들어갔다.
"세츠나."
"?"
"노래, 불러줄까?"
마리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남자가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가볍게 떨린 남자의 손을
살며시 다잡으며 마리나가 말했다.
"다시 만나면 불러주기로 약속했었잖아."
아주 먼 기억 속의 약속이었다. 마리나의 말에 남자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네가 힘들지 않다면."
미소지은 마리나의 입에서 조그맣게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너무나도 작았
지만 방 안이 조용했기 때문에 남자의 귓가에 살그머니 와닿았다. 조심스럽게 마리나의 침대
옆에 기대어 앉은 남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조금은 낮아졌지만 예전과 같은 따스함을 간직
한 그녀의 노래가 두 사람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잦아들어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쭉 잡고 있
었던 그녀의 손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깊은 잠이 든, 여전히 기품있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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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마지막 장면을 쓰고 싶어서 후다닥 써본 글.
+) 세츠나와 마리나는 재회하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다고 생각
했지만 극장판이 있으니까 곧 만나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극장판 개봉 전에!
세츠나와 마리나가 같이 있는 장면을 더 쓰고 싶었는데 gg;
세츠나는 위장해서 들어왔다고 생각해주세요.. 네...;;